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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서 알게 된 것들

돈이 없으면 시간도 없을 수 밖에 없는 이유

돈이 없으면 시간도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

4년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이것저것 신경 쓸 게 참 많았다. 4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짐들과 각종 서류 준비에 그리고 사랑하는 반려견을 비행기에 태울 준비까지. 그런데 막상 하나하나 정리를 시작하다 보니 나름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며 살아온 덕분인지 생각보다 짐은 얼마 되지 않는 듯했다. 한국에서 처음 뉴욕에 올 때처럼 화물용 여행 가방 두 개와 기내용 가방 하나 백팩 하나면 웬만한 짐들은 넣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각종 주방 용품들과 가전제품들이 아깝긴 하지만 배송료를 추가로 내면서까지 가져간다면 다시 사는 비용과 거의 비슷할 정도니 애써 짐을 다 가져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내 물건과 내 서류에 관한 준비보다 반려견에 대한 준비가 꽤나 복잡하고 기간도 오래 걸렸다. 그리고 내 물건은 있는 물건도 버리고 갈 판국인데 강아지 물건은 한국에서 팔지 않는 모모의 최애 간식을 비롯해 몇 개를 더 사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반려견의 비행기 탑승을 위한 기내용 가방이었다. 원래 사용하던 가방이 있었지만 강아지가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강아지 가방이 의자 좌석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높이여야 하기 때문에 지금 쓰고 있는 강아지 가방은 비행기에 탑승용으로는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일등석의 경우 강아지 가방의 높이는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일반석의 경우는 앞좌석 아래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하드 케이지의 경우 20cm를, 소프트 케이지의 경우 26cm을 넘으면 안된다는 항공사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아마존에서 강아지 비행기 탑승용 가방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재질과 금액이 천차만별인 가방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왔다.

디자인도 좀 예뻤으면 좋겠고, 우리 강아지가 비행기안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확장형 가방으로 넓이도 좀 넓힐 수 있는 타입이면 좋겠고 그리고 금액도 합리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방을 고르다 보니 결국 나는 3일 동안 가방을 주문할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이 가방을 비행 한 달도 전인 지금 급히 구매하려고 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강아지는 뉴욕에서 한국까지 비행시간인 14시간을 포함해 탑승 후 기다리는 시간과 이륙 후에도 약간 딜레이 될 수 있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얼추 15시간에서 16시간 정도를 이 가방에서 보내야 하기 때문에 가방과 먼저 친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안 그래도 난생처음 비행이 불안할 작은 강아지에게 가방이라는 물건조차 낯설다면 더 힘들 것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강아지와 가방이 친해지는 시간을 만들어주기는 커녕 나는 가방을 고르고 주문할 수 조차 없었던 것이다. 마음에 드는 가방은 금액이 너무 비싸고 금액이 적당한 가방은 뭔가 하나씩 부족해 보이는 부분이 마음에 걸리고 그러다 보니 결국 주문도 하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버렸다.

 

집에서 가방을 고르는 시간 뿐 아니라 산책 중에도 나는 계속 고르지 못한 가방에 시달려야만 했다. '강아지가 비행할 일이 얼마나 되겠어. 일단 한 번 쓸 거니까 저렴한 걸로 사자' 싶다가도 '난생처음 비행인 강아지가 15시간 이상을 머무를 가방인데 조금 비싸더라도 최대한 편안한 걸로 사주는 게 맞지'하는 생각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동생과 통화를 할 때도 강아지 가방에 대해 상의하고 머리를 식히려 TV 프로그램을 보는 동안도 가방 생각에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길 수 없었다.

 

그렇게 4일째가 된 오늘 아침 이대로는 안되겟다 싶어 눈을 뜨자마자 가방을 먼저 주문했다. 이 선택을 매듭짓지 않으면 오늘 하루 동안도 어마어마한 아마존 사이트의 상세 페이지와 리뷰들을 읽어가며 강아지 가방을 고르는 일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빼앗길 것은 자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결정한 가방을 주저 없이 주문하고 책상에 앉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이 없다는 건 참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내 시간을 어마어마하게 빼았기는 일이구나.'

 

사실 평범하게 경제 생활을 할 때 나는 이런 쇼핑 문제로 크게 고민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설령 몇 만 원짜리 물건을 잘못 사서 그 물건이 쓰레기가 된다고 해도 그걸 계속 고민하는 자체가 내 시간을 좀먹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지난 3월 뉴욕의 락다운이 시작되고 4개월째 경제생활이 중단되어 수입이 전혀 없이 지내다 보니 지금까지의 생활 패턴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는 쇼핑을 하는데 금액 대비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소비를 함에 있어서 평소보다 신중을 기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비를 함에 있어서 어떤 물건을 사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을 하되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최대한 신속하게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설령 내 선택이 완벽하지 못해 내가 구매한 물건은 생각보다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10시간 동안 꼼꼼히 다른 모든 구매자의 리뷰를 읽어보고 철저한 검색을 마쳤다면 아마 훨씬 더 효율적인 구매를 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구매가 효율적이었느지 물건의 효율성만을 따질 뿐 그 물건을 구매하는데 들어간 나의 시간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은 관리자에게 맡기고 그들은 오롯이 중대한 결정에만 그들의 모든 생각을 쏟아붓는다는 것쯤은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경제적으로 그만큼 풍요롭지 못하다면 당연히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내 생활에 모든 것들은 나의 시간을 들여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처럼 돈으로 다른 사람의 시간을 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비효율적으로 흘러 보내는 시간만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흔히들 돈이 없으면 더 많은 시간 일을 해야 하고 시급이 낮은 일을 할수록 생계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기 때문에 돈이 없을수록 시간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돈이 없으면 선택을 하는데도 시간이 더 많이 뺏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식적으로라도 내 시간을 무의식의 가난함에 뺴앗기지 않으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