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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서 알게 된 것들

인생에서 '언젠가'라는 단어를 삭제하다.

인생에서 '언젠가'라는 단어를 삭제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처음 뉴욕 생활은 '설렘' 그 자체였다.

낯선 곳에서 시작하는 생활이 두렵기도 했지만 뉴요커들처럼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도 하고 맨해튼 거리를 활보하며 다닐 생각에 하루하루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집을 구하기전까지 묵던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쥐도 함께 하는 생활이었지만 그조차도 로맨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한때는 뉴욕 생활에 매우 심취해있었다.

뉴욕에서 한 달동안 여행을 했을 당시 시간이 없어서 미처 다 둘러보지 못했던 명소들을 매주 돌아다닐 수 있고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던 장소들을 마음껏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행복했었다.

 

 

첫 한 해는 그래도 랭귀지스쿨에 다니면서 알바도 하고 쉬는 날 없이 지내며 큰돈도 없는 처지치고는 나름 잘 돌아다녔다. 여행 당시 너무 예쁘다고 느꼈던 도시인 필라델피아와 워싱턴 D.C, 보스턴등을 다시 여행하기도 했고 여행으로 왔을 때는 시간이 없어 패스해야만 했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매년 선정되는 나이아가라 폭포도 갔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에 계획했던 시카고나 캘리포니아 등 다른 주를 여행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 할 정도로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누가 '맨해튼'에서 만나자고 하면 약속을 취소하고 싶어 질 정도에 이르렀다.

 

뉴욕 생활 3년정도가 지났을 때 한국에서 놀러 온 동생과 뉴욕 곳곳을 다닐 때도 나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동생은 
"언니도 찍어줄께"라며 나에게 포즈를 취하게 하고 내가 사진을 찍기를 바랐지만 뉴욕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인 브루클린 브릿지에 함께 갔던 날도 나는 사진 한 장을 찍지 않았다.

귀찮기도 했지만 '언젠가 또 올텐데.'라는 마음이 제일 컸을 것이다.

실제 이 곳 뉴욕에서 삼사십년을 거주하면서도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캐년등의 유명한 관광지 여행을 매번 미루고 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살면서 '언젠가'그리고 '언제'라는 말을 참 많이 쓰는 것 같다.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은 정말 같이 밥을 먹을 약속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을 때나 대화를 마무리하는 상황에서 어색하지 않게 종료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이라는 것을 대부분 잘 알고 있다.

한 때 외국인들은 한국인이 "언제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을 하면 스케줄러를 열어 약속을 정하려 할 정도로 이것이 한국인들의 언어 습관이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화두가 되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렇게 "언제"라는 시점으로 얘기될 경우의 식사 자리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언제' 또는 '언젠가'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동일한 뜻일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뉴욕에 살면서 '언제 뉴욕 현대 미술관 MOMA에 다시 한번 방문해야지', '언제 브루클린 브릿지를 다시 한번 혼자 걸어봐야지.', '언제 캘리포니아나 시카고도 한 번 가봐야지'하는 식의 생각들은 결코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뉴욕에 살면서 언제라도 쉽게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도시들은 더이상 코로나 19와 미국 시위 상황까지 겹친 이 마당에 두 달 후 한국으로의 귀국을 계획하고 있는 나에게 현실성이 없는 얘기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늘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속에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생각한다. '언젠가 돈벌면 그때 부모님께 효도해야지' '나중에 좀 덜 바쁠 때 그때 우리 아이들과 반려견들과 시간을 좀 더 많이 보내야지.' '언제 시간 되면 옛날 친구들한테 연락 한 번 해보고 얼굴 좀 보고 살아야지.'

하지만 그 언젠가는 특정 시간을 정해놓지 않는한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시간들을 미루고 있는 동안 부모님은 더이상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 들어가실 것이며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가장 필요로 하는 유년 시절이 지나게 될 것이고 친구들 중 누군가는 정말 힘든 시간을 마음 터놓을 사람 없이 힘겹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늘 '언젠가'라는 마법의 단어로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곤한다.

 

'언젠가'라는 단어는 그런 것 같다.

지금 당장 하지는 않아도 나중에 내가 그 일을 할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을 때의 죄책감에서 나를 조금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주는 단어.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뉴욕에 지내는 4년이라는 시간동안 코로나 19 또는 시위, 폭동, 통행금지 등의 단어를 단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했다.

아마 내가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고 해도 나는 이런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 했을 일이 현실로 일어나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졌고 내가 상상도 못한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과 시위로 인한 폭동까지 여러 상황들이 더 이상 나를 뉴욕에 지낼 수 없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여러 해 동안 '한국이 그리워서', '한국에서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싶어서'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싶어서'라는 이유로 귀국을 고민해 본 적은 많지만 결과적으로 나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인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과 시위와 폭동으로 불안해진 미국 사회였다.

 

내가 한국을 떠나서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세상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자신 뿐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사회적 상황도 사랑하는 연인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더이상 '언젠가'라는 마법의 단어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마음의 부담을 더는 짓은 그만두고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언젠가'라는 단어 대신 특정 시간을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젠가 부모님께 효도해야지'대신 올해 아빠 환갑 때 서프라이즈 환갑잔치를 해드리는 것으로 몇 년간 못한 효도도 하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지.' '한국 가기 전에 언제 한 번 연락해서 뉴욕에 있는 친구들도 좀 만나고 가야지' 대신 '오늘 당장 연락해서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도 좀 묻고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했다는 내 안부도 들려줘야지.'

'언제 우리 강아지 발 털좀 잘라주고 발톱 정리도 좀 해줘야지' 대신 '슬개골이 제일 약한 종중에 하나인 치와와인데 지금 당장 발 털부터 밀고 스트레스 안 받게 발톱 좀 하루에 하나씩 갂아줘야.'

이렇게 바꾸고 마음이 한결 상쾌해졌다. 정리할 물건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고 계속 서랍에 묻어두고 쌓아두며 정리할 시간을 미뤄오며 어느새 발디딜틈없이 지저분해진 방을 말끔하게 치우기라도 한 것 처럼 '언젠가'로 계속 묶어두던 일을 당장에 해치우는 기쁨은 생각보다 꽤 크다.

 

내가 한국을 떠나서 알게 된 사실은 '언젠가'라는 단어는 청소하지 않는 방처럼 내 마음을 지저분하게 만들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