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공포증 이겨내고 강아지와 가족이 되게 해준 도시 뉴욕.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다음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학교에 가는 길을 알려주고 또 알려주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아빠는 딸이 학교에 잘 가는지를 뒤에서 몰래 따라오며 확인하고 있었다. 한참을 학교 방향으로 잘 가던 딸아이는 중간쯤 도착했을 무렵 잠시 멈춰서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아빠가 알려 준 길이 아닌 다른 길로
향한다.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며 딸을 지켜보던 아빠는 딸아이가 '길을 잃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조금 돌아서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아이를 보며 걱정에 빠진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아빠가 알려 준 길은 아니었지만 다른 길로 돌아서 학교에 무사히 도착한 딸의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했고 그 날 저녁. 아빠가 딸에게 물었다.
"아침에 학교 갈 때 길을 잃었었니?" 딸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렇지 않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빠가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아빠가 알려준 빠른 길을 두고 다른 길로 돌아갔니?" 딸은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답했다. "골목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나를 너무 무섭게 쳐다보고 서있더라고." 그래서 시계를 봤는데 옆 길로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돌아갔어" 잠시 아침 일을 회상하며 아빠의 물음에 답하던 딸이 아빠에게 묻는다.
"근데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빠는 집에 있었잖아." 아빠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답한다.
"우리 딸 학교 잘 찾아가는지 걱정돼서 아빠가 몰래 따라가 봤지. 그런데 가다가 중간에 멈춰 서서 이리저리 둘러보길래 길을 잃었나 보다 했어. 걱정돼서 뒤에서 지켜봤더니 옆 길로 조금 돌아서 학교에 잘 찾아가길래 안심하고 집에
돌아왔지."
8살. 그때는 몰랐다. 뒤에서 나를 지켜봐 주고 있는 부모님의 존재가 자식에게는 얼마나 든든하고 큰 힘이 되는지.
늦은 나이에 처음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낯선 나라에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신나고 설레었다. '처음 하는 독립이 서울의 오피스텔도 아닌 미국 그것도 내 꿈의 도시 뉴욕이라니.'
부모님의 잔소리란 그 베이스가 사랑과 걱정임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내 귀를 때로는 내 양심을 괴롭히던 부모님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잔소리로부터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내가 사는 뉴욕 집에는 부모님의 간섭보다 더 무시무시한 뉴욕
쥐와 날아다니는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바퀴벌레들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됐고 파트타임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생계는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최저 시급에 내 모든 시간을 내다 팔아야 했고 계속되는 노동에 손목의 모양이 변형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비싼
어학원 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 일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누군지 왜 여기에 살고 있는지조차도 희미해져 갔다.
처음에는 맨해튼 곳곳을 돌며 필라델피아와 보스턴, 워싱턴 D.C까지 뉴욕과 가까운 미국 동부에 있는 도시들을 원 없이 여행하며 나름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뉴욕에 살면서 힘든 점은 즐거운 점보다 압도적으로 커져갔다. 한국에서 재밌게 보던 일주일의 피로를 날려주던 예능 프로그램도 워너비 배우 손예진 님의 드라마와 영화도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조차 나를 위로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즈음 내가 가장 힐링을 할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펫 샵이었다. 당장 강아지를 데려 올 생각은 없었지만 펫 샵에서
강아지를 보러 왔다고 말하면 여러 강아지들과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마다 작은 강아지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느끼며 다시 한번 삶에 용기가 나곤 했다.
그렇게 펫 샵의 직원이 바뀌어서 나를 기억하지 못 할 정도의 시기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펫 샵을 찾아 강아지들에게 위로를 받곤 했다.
한국에서 강아지를 한 번도 안아본 적은 없었다. 무서웠고 털이 묻는 것도 싫었고 침도 싫었다. 사람들이 강아지에게
큰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외롭고 힘들고 아프고 주저앉고 싶을 때 희망과 용기를 준 대상은 바로 이 도시 속 작은
강아지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선뜻 강아지와 가족이 될 용기를 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동생이 뉴욕으로 여행을 와서 한 달 정도를 함께 지내다 돌아간 그 날 나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혼자가 아닌 둘이고 싶었다. 그렇게 펫 샵으로 향했고 가장 부담 없는 치와와 종을 선택해 가족으로 맞았다.
그렇게 치와와 모모 공주와 나는 가족이 되었고 모모공주와 처음 함께 하게 된 날 나는 아빠 생각이 났다.초등학교
입학식 다음 날 강아지가 무서워서 학교에 가는 지름길을 두고먼 길로 돌아가던 나를 지켜봐 주고 있던 아빠.
그 때나 지금이나 묵묵히 내 뒤에서 나를 지켜봐주고 나를 지탱해주는 힘은 아빠였고 엄마였고 내 가족이었다.
이제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경력이 단절된 나의 한국 생활은 코로나의 공포로 뒤덮인 지금의 뉴욕보다 더한 지옥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내 옆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내 가족이 더 늘었다는 것이
또다시 나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준다.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나를 더 강하고 담대하게 한다.
강아지를 무서워하고 싫어하고 강아지에게 위로를 받고 강아지와 가족이 되고 강아지를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기 까지.
강아지는 나에게 그만큼의 의미가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나에게 강아지 가족을 만들어 준 노랗고 차가운 도시 뉴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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