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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서 알게 된 것들

'친구'란 무엇일까? 친구가 없어서 행복했던 뉴욕 생활을 정리하며 드는 생각들.

'친구'란 무엇일까? 친구가 없어서 행복했던 뉴욕 생활을 정리하며

 드는 생각들.

 

새벽 네시 잠시 잠에서 깨 핸드폰을 보니 대학 동기에게 온 페이스북 메시지 한통이 눈에 들어온다.

잠결에 훑어보니 코로나 19 상황이 심각한 뉴욕에 살고 있는 내가 걱정돼서 보낸 모양이다. 너무 고마웠지만 눈도 잘 안 떠지고 졸려서 일단 다시 좀 더 잔 뒤 아침에 확인하기로 한다.

 

해가 중천에 떠 내 얼굴에까지 햇빛이 내리쬐자 얼굴에 기미가 생길까 무서워 얼른 일어나 그제야 어제 새벽 잠결에

대충 봤던 페북 메시지를 확인한다. 나의 첫번째 대학 동기였던 그녀와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심지어 서로 연락처도 모르고 지내는 터였다. 그러니 내게는 그냥 '친구'라는 단어보다  '페북친구'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법한 그런 사이였다.

가끔 서로의 페이스북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는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정도의

사이랄까. 그런 그녀가 엄청난 장문의 메시지에 뉴욕에 지내는 내가 너무 걱정되고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보낸 것도 사실 약간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곱씹어 메시지를 읽을수록 그녀의 진심이 묻어나는 글의 내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 역시 진심을

가득 담아 그녀에게 답문을 보냈다. 코로나 19로 집에 갇혀 지낸 후 한국에서 주문한 쫀드기 30개와 손글씨를 연습할 수

있는 책이 배송 온 날 이후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그 연락으로 인해 10년도 전 대학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꺼내볼 수 있는 하루.

 

모든 게 어색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이름의 가나다 순으로 짜인 실습조에 그녀와 나는 함께 배정되었고 그것이

그 친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항상 과 1등을 차지하던 친구였기에 나는 매번 그녀가 집에서 정성스레 해온 과제를 쉬는 시간 10분 만에 정신없이 베껴서 제출하곤 했다.

 

시험 기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험 기간이 찾아오면 늘 그녀의 잘 정리된 노트를 복사해 요점만 달달 외워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던 그 친구만큼은 아니었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학점을 받을 수는 있었다. 그렇게 학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나는 졸업반이 되자 우연히 그 친구가 간절히 원했던 회사에 그 친구와 같이 입사 시험을 보게 되었고 혼자서만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아직 졸업 전이었던 그때, 우리 과의 다른 동기들조차 항상 과 수석을 차지하던 그녀가 아닌 항상 뺀질거리기만 했던

내가 좋은 회사에 취업한 사실이 못마땅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어렸고 지금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다들 내가 부러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취업을 한건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며 볼성스럽게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학교 앞문에 나의 취업 소식을 홍보하는 현수막을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은근히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뻔뻔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그 친구가 나를 미워할 거라고 생각했고 시간이 지나  미워는 하지 않더라도 좋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고 그녀의 연락은 코로나 사태 이후 나에게 가장 근사한 하루를

선물해주었다. 늘 뉴욕에 살면서 내가 행복했던 이유는 친구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없기에 비교할 대상이

없었고, 관심도 없던 물건에 욕심을 낼 필요도 없었고, 보이기 위한 인생을 살 필요도 없으니 행복했던 거라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 이후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것도 '친구'라는 이름의 존재들이었다.

'정말 친한 친구 몇 명에게만 돌아왔음을 알려야지.''예전처럼 스케줄러를 꽉 채울 정도로 일부러 사람들을 만나진

말아야지'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은 아예 만나지 않을 수 있게 집에서 일을 해야지'등등.

어떻게든 사람을 피할 계획만 세워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직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인스타 디엠이나 페북 메시지 카카오톡 등 그간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에게 연락이 온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그들은 내 계획에서 내가 한국에 가서도 연락을 하려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친구란 무엇일까?' '친구가 없어서 뉴욕 생활이 행복했다는 내 생각은 과연 옳은 생각이었을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생각해보니 한국에 살 때 어느 누구도 내 인생이 부족하다거나 틀렸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 안에서 불행을 만들어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나는 뉴욕에 살며 내 탓이 아닌 애꿎은 그들의 탓을 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때문에 내가 한국에선

행복하지 않았던 거라고.

 

한국에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대학 동기의 우연한 연락은 내게 그 어느 때 보다 멋진 하루를 선물했고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내가 그간 가지고 있던 생각마저 바꿔놓았다.

 

이제는 정말 알 것 같다. 늘 남들과 비교하며 나를 괴롭혔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나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인생을 살았던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내 책임이라는 것을.

 

문득 자신이 생겼다.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뉴욕에서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나를 위한 삶을 살 자신이 생겼다.

내게 '친구'란 '좋은 친구'란 '좋은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피하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아니라 비교와 불평 불만으로 가득했던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