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까지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은 뉴욕에 사는 나는 지금...
미국 동부 시간으로 4월 5일 미국 뉴욕시 브롱스 동물원에서 4살짜리 말레이시아 호랑이 나디아가 코로나 19 양성
판정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다. 미국 내에서 동물의 코로나 19 감염 첫 사례로 코로나 19에 감염된 동물원 사육사로부터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사를 읽은 날 오후 렌트비를 내기 위해 집주인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계좌이체나 체크를 거부하는
아저씨는 이날도 역시나 캐쉬로 렌트비를 받길 원하셨다.
그런데 본인이 지금 오실 수가 없으니 2층 아주머니에게 맡겨놓으라는 말씀에 전화를 끊은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뉴욕시에서만 하루에도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가 몇 백명씩 쏟아져 나오는 이 상황에 본인이 집주인도 아닌데 돈을
맡기러 온다면 반가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2층 아주머니께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펄쩍 뛰시며 서로 마주치는 것을 조심해야하니
플라스틱 백에 싸서 신발 옆에 끼워두면 나중에 픽업을 하시겠다고 하셨다. (3층짜리 하우스지만 1층 사람들은 계단이 있는 문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실상 하우스 계단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머니가족이 전부이기에 누가 가져갈 위험은
없었다.)
아주머니의 불안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해서 나는 돈과 봉투 플라스틱 백 전부 알코올 뿌려서 신발 옆에 둘 테니까
시간이 조금 지나서 픽업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그게 좋겠다고 하시며 베이사이드에 사는 아주머니 조카 남편이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현재
산소 호흡기가 없어 대형견용 산소 호흡기를 이용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니 각별히 조심하라며 나를 걱정해 주시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고는 나중에 이 사태가 좀 진정되고 무사히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한 하우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치고는 상당히 어색한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아주머니와 전화를 끊고 바로 손세정제를 꺼내들었다. 현재 뉴욕에서는 구매도 할 수 없는 내 clean well 손세정제였다.
아마존에 몇몇 제품이 있으니 사실 구할 수는 있지만 평소 내가 쓰던 브랜드들이 아닌 난생처음 본 브랜드의 손세정제가 평소보다 훨씬 더 비싼 금액에 올라와있으니 사실상 못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껴 쓰고 아껴 써서 이제 겨우 네 통이 남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주머니를 위해서 한 통의 절반을 돈과 봉투
플라스틱 백에 뿌려대는 내내 기분이 참 이상했다.
손소독제가 아까워서 아껴 써야 하는 기분. 서로를 마주치기가 무서워서 돈을 전해주지 못하고 신발 옆에 감춰둬야
하는 기분. 이런 난생처음의 감정들을 오롯이 느끼고 있자니 '죽음'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미국 뉴욕시의 인구는 약 840명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 곳은 많은 불법체류자가
거주하는 곳인 만큼 통계된 인구보다는 더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이다.
4월 1일 기준 뉴욕시의 코로나 확진자는 총 44915명. 사망자는 1139명이었다. 그러나 어제만도 뉴욕주에서 총 700명이 넘는 사망자가 속출했으니 지금쯤이면 뉴욕시 사망자는 또 얼마나 늘어있을까. 더 이상은 확인하는 것 자체도
공포스럽다.
4월 1일까지 우리 동네에서만 5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왔다는 한 보도 자료를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전혀 느껴보지
못 한 종류의 공포가 엄습해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앰뷸런스 소리가 동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온종일 집에 머물면 하루에만도
열번이 훌쩍 넘게 듣게 되는 앰뷸런스 소리.
처음에는 너무나도 공포스러웠던 앰뷸런스 소리마저 무덤덤해지는 지금 이순간.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과연 죽음의 공포와 맞바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지금까지 원해왔기 때문에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놓으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놓지 못한다. 놓고 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지금까지 내가 쓴 시간들이 모두 날아가버리는 것 같아서 그러지 못하는 것일 테지.
하지만 과거를 정의하는 것은 현재라고 했던가.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밑거름이 되어 내가 모르던 나를
알게 되고 나란 인간이 조금 더 성숙해졌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이미 과거의 그 시간들은 내게 그냥 날려 보낸 시간이 아닌 어쩌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시기를 통해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단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서도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언젠가 맞이할 죽음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다 가겠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맞이할 죽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의미있는 시간들을 많이 보내는 것이
좋겠다'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정말 죽음과 가까워지고 그것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해 볼 떄
그제서야 비로소 내 마음에 대해 알 수 있는 것들일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고 죽고 많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피해를 본 상황은 당연히 가슴 아픈 일이고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 바래야 하는 일이겠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에만 알 수 있는 감정들이 있는 법이고 또 이것을
캐치하느냐 하지 못 하느냐는 오롯이 개개인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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