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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서 알게 된 것들

뉴욕 살이 5년 차. 인간관계에서도 미니멀 라이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 살이 5년 차 인간관계에서도 미니멀 라이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현대미술관 MOMA

뉴욕에 살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경험했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던 첫 시작. 다른 문화권에 처음 살아보며 겪는

불편함. 해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향수병. 자유롭게 미국 전역을 여행할 수 있는 즐거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는

불안함. 뭔가를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 힘들게 돈을 벌며 깨달은 노동의 가치. 강아지와 함께 하는 일상의

행복. 요가와 명상을 통해 시작한 마음 챙김. 코로나를 통해 '죽음'이라는 단어를 피부로 느껴보는 것 까지. 정말 많은

경험과 많은 감정 변화를 느꼈던 폭풍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알 수 없던 감정은 어느 날은 뉴욕에 살고 싶고 또 어느 날은 한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고의

반복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사는 장점은 명확했다. 나는 법적으로 한국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한국 국적의 한국 시민이고, 내 모국어가

쓰이는 나라이며, 세계적으로도 그 위상을 떨칠 정도로 수준 높은 의료 시스템과 치안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

반면 뉴욕에 사는 장점은 딱이 떠올리기 힘들었다. 굳이 찾자면 미세먼지가 없음. 미국 전역과 칸쿤이나 캐나다처럼

미국과 가까이 있는 곳들을 쉽게 여행할 수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상하게도 뉴욕에 지내고 싶은 마음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정확히 나뉜 피자

조각처럼 어떤 마음이 더 큰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 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한국에 사는 것이 훨씬 바람직해 보였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늘 '그냥 미국에서 지내자'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왜 였을까? 뭐 때문에 내 마음은 이 도시 속 이방인으로 살아야 하는 뉴욕에 나를 계속 묶어두려 했을까?

 

뉴욕 센트럴파크

'친구가 없다는 것'이 바로 내가 이 곳에 살며 행복지수가 높아졌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최근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한국에 돌아갈 일을 준비하는 내가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은 처음 뉴욕에 올 때  44 사이즈였던 내가 이제는 66이

되었기에 아무도 만날 수 없는 몸뚱이가 되었다는 것.

아무것도 이룬 게 없이 그냥 즐겁게 살았을 뿐인데 내가 뉴욕에서 무엇을 이뤘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친구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섹시한 미국 남자와 결혼 약속이라도 잡았을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돌아왔음을 알려야

한다는 것.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은 생계도 직업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친구'라는 이름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뉴욕에서 외롭고 힘들 때면 늘 가까운 친구들 생각이 났었다. 함께 만나서 커피만 마셔도 즐겁던 뷔페라도 가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끊임없이 수다를 떨다 보면 묵은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버리던 친구들과의 그 순간들이었다.

 

그런데 문득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그토록 그리웠던 친구들 중 몇몇은 아니 대다수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겉으로는 웃으며 괜찮다고 말해주겠지만 막상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돌아온 것에 대해

내 인생도 별 다를 거 없다고 결혼이라도 하고 아이라고 키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훨씬 낫다고 나를 통해

자기 위안을 할 사람들.

 

그러나 그건 결코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항상 무언가 그럴싸한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했던 나의 비틀어진 자아가 만들어냈던 인간관계이기에 그 역시 내 탓임을 이제는 안다.

뉴욕에서 지내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인 4년 동안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알바를 하면서 같이 수다도 떨고 회식도 하며 가끔은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한국에서처럼  누구와도

일부러 시간을 비워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는 한 명도 만들지 않았다.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니 억지로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됐고 억지로 잘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됐고 딱 그 선만 지키면 어떤 순간에도 서로 존중할 수 있고 서로의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뉴욕에서 지내는 긴 시간 동안 힘들고 외롭고 괴로운 시간도 많았지만 '친구'라는 대상이 없었기에 오히려 혼자서

이겨내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탐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주변에서 말하는 '인생은

이러이러해야 한다' 가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인생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워싱턴 D,C 자연사박물관

뉴욕에 지내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많은 물건을 사지 않고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삶에서 오는 기쁨이었다.

한국에서의 쇼핑 라이프를 버리는 데 까지는 한참이 걸렸지만 '친구'가 없으니 남들이 사는 것을 나도 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을 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미니멀 라이프를 하게 되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물건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려고 한다.

 

가식적으로 대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사랑해 줄 몇몇의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는 인간관계만을 남길

것이다. 정말 꼭 필요한 물건만을 사고 불필요한 물건은 언제라도 버릴 수 있을 때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안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것 처럼 인간관계에서도 그런 것들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만날 친구는 많았지만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짜 친구는 몇 안됐던 이전의 한국 라이프를 다시 되돌리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이제는 잘 알고 있다.